공간, 번역
2019-08-08 작성한 노트에서 발췌
돌아다니며 머물렀던 공간들을 각각 하나의 방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방 사이를 오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대중교통, 보행을 통해 걸리는 시간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도시에서 방문한 공간들을 여러 방들이 엮여있는, 하나의 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간 안에 동선을 설정해두고 동선 위를 움직이는 사람이 겪는 매 순간의 경험들을 시간에 따라 길게 펴서 나열하면 시간 축을 깊이로 하는 기다란 선형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몸을 1과 3/4바퀴만큼 돌려야 원래 보이던 풍경을 볼 수 있던 꿈을 꾸었다면 꿈에서의 각도를 현실 공간의 어떤 개념에 맵핑시킬 방법을 정해서 두 공간을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같은 공간도 바라보는 주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과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은 속도 차이로 인해 도시를 다르게 이해한다고 한다. 사람들과 고양이들은 도시 내에서 움직여 다닐 수 있는 공간이 다를 테니 도시 공간의 연결관계를 다르게 이해할 것이고, 뛰어난 후각을 가진 개들은 공간에 후각 정보를 맵핑하여 이해할 것이다.
하나의 주체도 같은 공간을 여러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처음 가보는 맛집에 방문한 상황을 상상해보자. 누군가는 이곳을 온라인 상에서 검색해본 여러 다른 맛집들 사이의 순위를 떠올리며 바라볼 것이고, 누군가는 이곳을 걸어가면서 봤던 지도 상의 한 지점으로 바라볼 것이고, 누군가는 맛집이 위치한 동네의 공기, 걸어가며 마주친 풍경들의 시퀀스, 근처 빵집의 빵 굽는 냄새 같은 디테일로 맛집을 바라볼 것이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공간들과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무수히 많은 관점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공간 번역가들은 여러 공간-관점들 사이에서 의미 있는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있도록 연결 짓는 사람들이다. 도시 내의 업무 공간들과 주거 공간들 사이의 관계를 엮어 새로운 시설을 지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는 건축가도 공간 번역가다. 지도 어플을 보고 걷는 사람들은 화면 공간 위의 점, 선, 면을 도시 공간과 본인의 위치에 맵핑시키고 있으므로 여기에선 어플을 디자인한 사람이 공간 번역가다.
공간 번역가들은 어떤 정보를 어떻게 정의된 공간에 어떻게 맵핑할지, 이를 통해 공간 경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상공간에서의 경험과 현실 공간에서의 경험의 상호작용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시대에는 이에 걸맞은 공간 번역가들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