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보기

2019-09-06 작성한 노트에서 발췌

물리적인 세계에서의 도시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디테일의 제한이 없다. 건물을 설계하고 시공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디테일을 신경써서 표현할지, 도시의 사람들이 이 디테일을 어디까지 볼지에 대해 고민하긴 해도 이미 만들어놓은, 그래서 눈 앞에 존재하는 디테일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누락이 생기면 어떻게 할지에 대해 고민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 mm 단위로밖에 오차가 나지 않는 타일 바닥의 틈, 자연석의 무늬가 그대로 살아있는 벽, 매끈하게 마감된 콘크리트 벽, ...

가상 도시에 자연석으로 만든 벽이 세워져있다면 우리는 이걸 어떻게 '보는' 걸까? 저 멀리 자연석 벽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딘가에 자연석 벽의 디테일과 벽의 위치가 정보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가,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든 내 화면에 나오기 바로 전의 원본 정보들이 모이는 저장소로 흘러들어오고, 그곳에서 내 위치와 벽의 위치를 고려하여 벽의 정보를 화면에 표시하기 위한 형태로 변환된 뒤, 벽이 화면에 나타난다. 화면에는 해상도가 있고, 벽의 정보가 아무리 디테일해도 화면에 표시되는 영역이 좁으면 딱 그 영역 만큼으로 벽의 정보가 변환된다. 벽의 정보가 너무 크면 이를 변환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이고, 걸린 시간만큼 화면에 나타나는 데에 딜레이가 생긴다. 앞서 두루뭉술하게 벽의 정보가 저장소로 흘러들어간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긴 경로를 거치는지에 따라 추가적으로 시간이 들어갈 수도 있다. 벽 하나를 보기 위해 시각적인 정보 손실이 일어나고 일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이는 물리적인 도시를 설계하는 데에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벽 한 두 개 정도를 화면에 표시할 때는 벽의 디테일한 정도와 벽이 화면에 나오기까지의 시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벽의 개수가 늘어나는 만큼 정보를 저장하는 데에 더 큰 공간이 필요할 것이고, 정보들이 이동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늘어날 것이며, 정보를 화면에 그려주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늘어날 것이다. 규모에 대한 감을 더 쉽게 잡기 위해 벽 대신 나뭇잎을 가지고 생각해보자. 나뭇잎 하나를 보여주는 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수 천 개의 나뭇잎이 붙어있는 나무는 어떨까? 그런 나무가 수 천 그루 있는 언덕이 있다면? 그런 언덕이 도시에 수 천 개 존재한다면? 여기서 재미있는 건, 내 시야 안에 수 천 개의 언덕이 다 들어오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언덕의 나뭇잎들은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나뭇잎들은 분명히 도시에 존재하므로, 이에 대한 정보가 어딘가에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이 나뭇잎을 보고 있지 않으므로 당장 화면에 그려줄 때 고려할 필요가 없다. 언덕 하나를 화면에 그리는 데에 1/100초가 걸린다면 언덕 1000개를 그리는 데에는 10초가 걸린다. 나에게 보이는 언덕이 하나밖에 없다면 언덕 1000개를 다 그려주는 건 내가 도시를 보는 데에 지장을 주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언젠가 볼지도, 혹은 영영 보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뭇잎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물리적인 도시에서는 내가 시공한 건물에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고민하며 시공을 할 일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