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하는 건축가들
2024. 07. 21.
건축 공부를 하다가 7년째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입장에서, 건축가들이 컴퓨터 친화적인 데에 비해 제대로 개발을 공부해볼 기회가 별로 없다는 것이 꽤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어찌 보면 건축가들은 건축 실무를 하면서도 그래스호퍼나 다이나모, 루비, 리습 등을 통해서 직접 프로그래밍해볼 수 있는 환경에도 꽤 노출되고 있으니 조금만 더 나아가면 될것 같은데, 왜 거기서 한 발자국을 더 안 내디디는 걸까? 요즘 들어 컴퓨테이셔널 디자인을 공부했다고 말하는 건축가들이 꽤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그 중에 현업에 바로 투입되어 같이 개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기본기를 갖춘 사람들은 많지 않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다음의 이유가 떠오른다.
- 건축학과 수업에서는 보통 그래스호퍼를 쓰는 방법만 가르쳐주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개발 현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스호퍼를 쓰는 건축가들은 보통 유지보수와 협업에 신경을 쓰지 않고 일단 작동하는 결과물부터 만드는 것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서비스를 만들어봤으면 알겠지만 이런 작업 방식으로는 딱 프로토타입 까지밖에 만들지 못한다. 한 프로젝트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능을 만든 다음 이를 합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옆 사람이 만든 기능을 내가 대신 수정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으려면 어떻게 프로젝트를 세팅해야 하는가? 건축을 공부하면서는 이런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것을 보기 어려웠는데, 개발을 하다 보니 개발자들은 이런 고민을 숨쉬듯이 하더라. 현업에 필요한 개발자는 내가 지금까지 짜놓은 코드 위에서 같이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이지, 희한한 형태를 만들거나 애매한 최적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대다수의 건축가들은 본인들이 무엇까지 다뤄보았는지, 그래서 무엇을 만들었는지 자체에만 집중해서 포트폴리오를 만든다.
- 건축하는 사람들은 도형을 정말 많이 다룬다. 그런데 하필 도형을 다루는 것이 개발자들 입장에서 봤을때 난이도가 낮지 않은 편인 데다가, 도형을 가지고 개발하는 분야들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건축가들과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개발자들이 많다면 이들이 생산해내는 컨텐츠들과 개발 문화가 자연스럽게 건축계에도 유입될 수 있었을 텐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개발을 공부하려는 건축가와 개발자들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개발을 하는 건축가들이 이루고 있는 커뮤니티들을 보면 현재 개발 업계에서는 많이 쓰이지 않는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무언가들을 서로 공유하면서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모습이 간혹 포착된다. 그런 맥락에서 개발 업계 전체의 지형을 놓고 보았을때 건축계는 갈라파고스 섬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현업에서 일을 해볼 수 있을 수준으로 개발을 제대로 공부해보는 건축가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건축가들은 개발을 공부하기에 정말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먼저, 건축가들은 개발을 공부하기 위한 동기 부여가 충분히 되어있다. 실무에서 오토리습이나 라이노 그래스호퍼, 레빗 다이나모를 쓰고 있는 것만 봐도 개발로 풀고자 하는 문제들이 넘치고, 이러한 문제를 푸는 것이 업무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건축가들은 컴퓨터와 친숙한 것을 넘어서서 커맨드 창에 명령어를 입력해서 무언가 실행시키는 것에도 이미 익숙하다. 다른 직군의 사람들이 처음 개발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런 커맨드 입력과 같은 작업에 겁을 먹기도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건축가들은 이미 예습까지 끝내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여기에 건축가들이 따라서 공부하고 실습해보기 좋은 자료들만 있다면, 건축가들도 충분한 개발 기본기를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예전부터 개발을 공부하려는 건축가들을 위한 자료를 정리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슬금슬금 실행에 옮겨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