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사용 가능한 과정과 건축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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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7. 23.

어렸을적 내가 좋아했던 "건축"은 레고와 카프라와 같은 것이었다. 도안과 재료가 주어지면 누구나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약간의 변주를 주고 싶다면 재료를 조금 바꿔보거나 조립 방식을 부분적으로 변형해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레고 블록을 사용해야 한다거나 카프라 블록과 같은 규격의 부재를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은 지키는 편이 좋고 이 규칙에서 벗어나면 원하는 결과물을 얻지 못할 수 있다.

처음 건축학과에 들어가면서는 내가 앞으로 배울 건축도 이런 것일 줄 알았다. 거대한 구조물이 무너지지 않고 수 십 년간 서있도록 하기 위해 모두가 따라야 하는 정교한 방법론이 먼저 존재할 것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건축가들은 이 위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다. 실제 와서 건축을 배워보니 이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긴 했지만... 어느 정도만 맞는 말이었어서 학과 공부에 적응이 어려웠던것 같다.

2학년때 작은 주택을 설계하는 수업을 들으면서 모형을 만들던 것이 생각난다. 우드락을 잘라서 모형을 만드는 상황에서 나는 만들고자 하는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고, 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조각들의 치수를 계산하고, 이 치수에 맞게 재료를 가공해서 형태를 만들었다. 나에게는 이 절차를 엄격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했는데, 돌이켜보니 실제 건축물을 짓는 과정에서도 부재의 치수를 정하는 것과 가공하는 것, 그리고 이를 조립하는 것은 서로 분리되어있는 과정이면서 정확하게 시행되어야 하는 과정일 거고, 그렇기 때문에 모형을 만드는 과정에도 이러한 정신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것 같다. 그런데 친구들이 모형을 만드는 것을 보니 일단 만들고자 하는 형태를 떠올린 다음에 적당히 치수에 맞게 우드락을 자르고, 원하는 형태가 안 나오면 적당히 눈대중으로 칼질을 몇 번 더 하면서 목표하던 형태를 맞춰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나였다면 원하는 형태가 안 나온 순간 첫 단계로 다시 돌아가서 차근차근 지나온 절차를 훑으며 오류를 찾아내려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모형을 만드는 데에 시간이 정말 많이 소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결과물을 만드는 시스템이 먼저 존재하고 이 시스템을 통해서 만들 수 있는 결과물을 탐색하는 것과 먼저 만들고 싶은 것이 존재하고 이를 어떻게든 만들기 위해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내가 생각하던, 그리고 배우고 싶었던 건축은 전자였는데, 대학에서 가르치는 거의 모든 건축은 후자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실제 건축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모든 건축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상당 수의 사례가, 후자에 더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슬프게도, 그리고 동시에 흥미롭게도, 내가 지금까지 건축에서 관심을 가져왔던 다양한 주제들은 공간과 형태가 따르는 이들에 선행되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었다. 파라메트릭 디자인은 디자인 과정에 변수를 넣어서 같은 시스템을 따르는 여러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고,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은 파라메트릭 디자인과 같은 방식으로 생성된 형태를 제조하는 것까지도 시스템화 시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건축 설계 자동화는 파라메트릭 디자인의 방법론에 뿌리를 두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훨씬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졸전에서 다룬 전자 건축은 그 자체만으로는 형태와 시스템 중 무엇이 선행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주제지만, 내가 이 주제에 접근한 방식은 메모리를 사이트로 하는 공간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그 기반과 가능성에 대해 다룬 만큼 철저히 만들 수 있는 형태 아래에 깔려있는 시스템에 대한 탐구였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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