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공간과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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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3. 27.

게임을 만들었다. 이 게임에는 평평한 갈색 땅과 우뚝 솟아있는 벽돌 무늬의 벽이 있고, 나, 혹은 캐릭터는 이 벽돌 무늬 벽 주변을 돌아다닐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땅과 벽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건축 설계 프로젝트로서 이러한 공간을 구현했다고 하면, 이 프로젝트의 대상지는 어디라고 할 수 있을까?

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보자. 어떤 건축 설계 프로젝트의 대상지를 동네에 있는 대학교 캠퍼스로 잡았다고 하자. 이 대상지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대상지로서의 자격을 잃게 될까? 전염병이 돌아서 이 캠퍼스에 있던 학생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갑자기 해수면이 상승해서 이 땅이 물에 잠긴다면? 캠퍼스 주변에 메테오가 떨어져서 기존의 시설들이 파괴되고 구덩이밖에 남지 않는다면? 이 외에도 여러 시나리오를 상상해보면서 대상지와 상호작용할 사람들을 제거하거나, 대상지가 속해있던 기존의 도시적인(혹은, 다수의 사람들의 공간적인 상호작용을 매개하던) 맥락을 파괴하거나, 공간의 형태를 바꾸거나, 공간이 속해있는 환경 조건을 바꿔보면서 대상지가 대상지로서 남아있을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슷하게, 가상 공간을 대상지로 잡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대상지를 괴롭힐 수 있을까?

가상공간에 운석이 떨어질 수 있을까? 애초에 이 세계에는 떨어질 운석도 없고, 구덩이를 만들 방법도 없을 지도 모른다. 평평한 갈색 땅을 물에 잠기게 하기에는 이 세계에 물이라는 개념이 없을 수도 있고, 전염병이 도는 상황을 가정하기에는 캐릭터가 병에 걸린다는 개념이 없을 수도 있다. 내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이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 뿐이고, 아무리 해도 이 공간의 규칙을 따르면서는 공간을 변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규칙 바깥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게임 화면이 보이는 모니터를 부수면 대상지는 사라진 것일까? 만일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새 모니터를 구해서 컴퓨터에 연결하면 새로운 대상지가 다시 생성된 것일까, 아니면 기존의 대상지가 복구된 것일까? 게임이 구동되고 있는 컴퓨터를 부순다면? RAM이 망가지면 대상지는 사라진 것일까? 그렇다면 RAM을 갈아 끼워서 다시 게임이 돌아가면 대상지가 복원된 걸까? 게임이 설치되어 있던 저장장치(SSD나 하드디스크)가 망가지면? 새로운 저장장치를 사서 갈아 끼운 다음 서버에서 게임 설치 파일을 받아서 다시 설치한다면? 서버에 있던 설치파일을 게임을 퍼블리싱한 곳에서 업데이트 했다면?

가상 공간의 땅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명확히 답하기 위해서는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땅은 땅의 정보가 흘러다닌 곳들 중 어딘가에는 분명히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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