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제작자의 공간 표현에 대하여 - 2
2012년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된 건축가 류춘수 선생님의 드로잉전에 갔었다. 이때 한담이라고 해서 다른 초청된 건축가와 류춘수 선생님의 대화 형식의 강연도 진행했었는데, 이때 건축가의 드로잉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있었다. 건축가가 그리는 선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있다고, 예를 들어 오줌줄기 하나를 그릴 때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많다고 하시면서 선에는 오줌줄기가 중력에 의해 휘어지는 형태, 내부로부터의 압력으로 인해 오줌줄기가 뻗어나가는 세기, 오줌을 이루는 성분의 상(이 경우 액체) 등이 고려된다고 하셨다.
이후에 이 이야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다가 류춘수 선생님께서는 드로잉의 가능성에 대한 설명만 하셨을 뿐이지, 드로잉이 가장 효과적인 표현 방법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줌 줄기를 정말 제대로 표현하고 싶다면 경우에 따라 사진이나 영상을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고, 물리 엔진이 구현되어있는 3D 소프트웨어를 써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맥락에서 건축학과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매체들이 실제 건축 문제를 풀기 위한 최선의 표현 방법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건축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이지만 건축학과 수업에서 배운 내용들로는 표현이 어려워 보이는 주제들을 찾아보았다.
둥지 만들기,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이 주제는 아래의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계 수업에서 배운 건축가들의 도면과 다이어그램으로 새의 둥지를 시공하는 방법을 표현할 수 있는가?
새의 둥지를 시공하는 것을 통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아주 많다.
- 둥지의 주 재료는 나뭇가지다. 둥지에는 수백, 수천 개의 나뭇가지들이 사용되는데, 이 나뭇가지들의 형태는 다 다르다.
- 완성된 결과물의 형태가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둥지가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정 크기, 형태 조건을 충족하면 시공이 끝난다.
- 결과물과 재료 모두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시공 절차가 명확하게 정의될 수 없다. 시공 방법만이 존재할 뿐이다.
만약 건축가가 물리적인 구조물을 세움으로써 공간을 만드는 방법을 제안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위의 주제도 건축의 영역에서 다룰만한 것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시도들이 많이 이루어진 분야가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세계적으로 여러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 인상깊게 보았던 작업을 둘 가져와보겠다.
ICD Aggregate Pavilion 2015¶
Rock Print: A Manistone¶
물리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세계, 가상 공간¶
이 주제에서는 아래의 두 소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건축가의 모형¶
건축학과 학생들이 축척에 따라 모형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도면을 그리고 렌더 이미지를 뽑는 이유는 결국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공간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정말 이게 목적이라면 1:1 스케일 모델을 만들어서 그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공간을 이해하기에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 아닐까? 다만 1:1 스케일로 공간을 만드는 데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를 간소화하여 작은 모형을 만들고 다른 표현기법들을 찾는 것이 아닐까?
만일 앞서 제기한 의문이 맞다면, 1:1 스케일의 공간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주어지고 이러한 환경을 제작하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합리적이라면 이는 모형을 대체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이미 3D 소프트웨어로 제작한 모형을 유니티나 언리얼 엔진 같은 게임 엔진에 올린 뒤 HMD(head mounted display)를 통해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졸업 전시를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방식이 좀 더 대중화 된다면 더 이상 우드락을 잘라서 물리적인 모형을 만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물리적이지 않은 공간¶
만일 우리가 직접 걷거나 움직여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이것도 건축의 영역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지금껏 우리가 이야기해온 건축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각자의 몸을 인터페이스로 사용하여 경험한 것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각자의 몸이 아닌 다른 인터페이스를 사용하여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 시대에서는 새로운 건축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미 2025년의 우리는 스마트폰에 설치한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하여 얻은 실시간 정보를 기반으로 도시를 돌아다니고, 다음에 갈 곳을 검색 엔진을 통해 찾아보거나 추천 알고리즘에 의해 나에게 노출된 광고를 토대로 정한다. 도시 혹은 건물의 물리적인 형태에 대한 표현만으로는 실제의 도시와 건물에서의 온전한 경험을 담는 것은 불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점차 개인화된 정보가 제공되는 시대에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표현 방식들을 새로 고안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