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공간과 도면
2025. 01. 22.
긴 휴학을 시작하기 전,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2010년대 중반 즈음 졸전을 한다면 1:1 스케일의 체험 가능한 공간까지 만들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미약한 근거와 강한 자기확신으로 이루어진, 실제로 작동할지 알 수 없는 건축 작업들을 보면서 그런 것보다는 규모가 작더라도 실제로 작동하는(혹은 작동하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을 해보는 것이 나에겐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생각은 가상 공간에의 건축으로 아이디어를 확장하면 정말로 실현 가능한 것이 된다(공간이 사람들의 경험을 매개하는 플랫폼이고, 공간과 경험을 디자인하고 이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건축가가 하는 일이라면, 가상 공간의 디자인도 건축의 영역에서 다루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휴학 후 개발 경력을 쭉 쌓으며 일정 수준의 트래픽을 감당할 수 있는 실제로 작동하는 서비스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작동하는 1:1 스케일의 공간'을 '예산안을 짜고 반 년 이내의 공기 안에 시공'까지 해서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졸전을 풀어나가려면 생각할 거리들이 아주 많아진다. 시공을 위해 필요한 정보로서의 도면에 대해 생각해보자. 원래라면 구조체와 벽체, 그리고 각종 디테일들이 들어간 도면이 필요했겠지만, 가상 공간의 시공은 사실상 서버-클라이언트 개발이 될테니 이를 위해 필요한 각종 아키텍쳐 다이어그램과 API 명세서가 도면을 대신한다. 체험 가능한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던 평면은 피그마로 작성된 유저 플로우 혹은 게임 업계에서 사용하는 레벨 디자인 기획서로 대체 가능하다. 공간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경우 공간이 변하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고, 이 경우 수도(pseudo) 코드가 기존의 공간 다이어그램의 역할을 이어받는다. 수도 코드는 각종 알고리즘을 설명하는 데에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형식인데, 많은 개발자들이 수도 코드를 보고 본인이 사용하는 언어에 맞게 알고리즘을 직접 구현한다는 관점에서 공간 설명 다이어그램의 역할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겠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건축 도면들은 물리적으로 고정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작성된 정보였다. 하지만 가상 공간은 물리적으로 고정되어 있을 필요가 없으므로, 멈춰있는 공간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인쇄된 도면은 가상 공간에서의 건축을 이야기하는 시대에는 절대 최선의 '건축적인' 표현 방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가상 공간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표현방식들에 대해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