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들
2020. 9. 26¶
도시는 물리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으나, 어떻게 보면 움직이는 사람들과 꽤나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것 같다. 판교를 생각해보면, 주중에 출근시간부터 퇴근시간까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과 상호작용 하다가, 점점 밤이 될수록 버스도 줄고 사람들도 덜 돌아다니고 점차 혼자가 되어 고요하게 지내고 다시 아침이 되면 복작복작 지내고, 주말에는 일하는 사람들 말고 놀러온 사람들(..당연히 주중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숫자도 적고 평온하다)이랑 지내다가 다시 월요일을 맞이하는 모습이, 그곳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의 생활패턴과 딱 거울처럼 대칭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도시에서 일하다가 퇴근한 것이겠지만 판교 입장에서는 도시가 한껏 들이닥쳤다가 빠져나가는 것이 아닐까.
2020. 9. 15¶
얼마 전에 갔던 카페에는 도보쪽 창문에 바 테이블이 있었는데, 바 테이블 제일 끝 자리 옆에 스탠딩 거울이 있었다. 거울은 자리에 앉았을 때 살짝 내려다보는 시점 기준으로 수직이 맞춰져 있었는데, 정말 미묘하게 기울어져있어서 거울 반대편에 있는 카운터 쪽이 시야에 잡혔다. 그래서 노트북으로 작업하고 있으면 주변시로 카운터쪽이 보이는데, 이게 마치 내 옆쪽 아래에 구멍이 뚫려있고 그 구멍 아래쪽에 공간이 있어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것 처럼 느껴졌다.
2019. 1. 18.¶
저녁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버스들, 차들, 그리고 걸어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도시였는데 몇 시간 뒤에 나오니 빈 택시들만 건물 주변을 맴돌고 있다. 밀물이 들어와서 회사에서 역까지 가는 길이 잠긴다면 이런 기분일까.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되어있었다.
2018. 10. 28.¶
벽.
어떤 타일에는 코팅을 해두고 어떤 타일은 그대로 붙여서 비가 온 날에는 평소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둔 그림을 볼 수 있었다.
2018. 7. 2.¶
지도.
'여기는 무슨 색이에요' 하고 여러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서 올리면 동네의 색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이런 색 조합의 동네를 찾고 싶군' 하고 검색을 하면 동네를 찾을 수도 있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위치정보 가진 사진들 크롤링해서 직접 만드는 것이 가능할듯 싶다.
2018. 3. 28.¶
방.
벽면에 점들을 찍어두고 멀리서 보면 한 눈에 별자리로 보이겠지- 하고 생각했으나 방이 좁아서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2017. 12. 6.¶
방.
문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복도로 나가기 위해 서로 다르게 생긴 미로를 지나야 하는 방들을 상상해보았다.
2017. 10. 22.¶
미로.
보고 있는 것들만이 그대로 남아있고, 눈을 떼는 순간 바뀌어 버리는 세상.
뒤에 입구가 있었는데, 다시 돌아보니 통로가 나타났다.
2017. 7. 18.¶
도서관.
책장
완전 밀착된, 겹겹이 있는 책장
겹겹이 있는 책장 사이에 기어들어갈 수 있는 통로
개미굴같은 도서관
2017. 6. 6.¶
화면 위의 글자들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글자들이 시선을 그대로 따라와서 건물들 표면에 박혔다.
문득 꼭 종이나 화면 같이 눈 바로 앞에 있는 글자로만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판이나 광고 말고, 시와 소설을 새겨넣은 건물은 어떨까.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여러 건물에 걸쳐서 단어들을 배치하면 어떨까.
2017. 5. 1.¶
둥지를 도면으로 표현하기 위해 나뭇가지의 단면을 하나 하나 그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무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하면 만들어진 뒤의 모습이 아닌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도면에 담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서는 만드는 재료와 방법이 같더라도 만들어지는 결과물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과물과 방법은 일대일 대응 관계가 아니라 다대일 대응 관계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때의 도면은 결과물의 가능성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어떤 표현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했다.
제작 방법마저도 이를 결정하기 위한 변수들로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과물들이 제작 방법에 종속되고, 제작 방법들이 이를 제어하는 또 다른 시스템 속에 종속된다면, 이런 식으로 시스템 위에 있는 시스템을 무한히 계속 만들어나갈 수 있을 터였다. 이런 관점이 도면을 바라보는 데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절대 이전처럼 도면을 볼 수 없게 되었음은 확실하다.
2017. 4. 13.¶
잠깐 졸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윈도우즈 업데이트가 모델링한 공간들을 전부 앗아간 뒤였다.
2017. 4. 12¶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2008년의 논문이었던것 같은데, 구글에서 1990년대 후반에 검색엔진에 사용하던 알고리즘을 사람들이 도시 공간을 점유하는 패턴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하여 연구를 진행한 사람이 있었다. 모든 물질적인 것을 잠시 뒤로 빼놓고,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특성은 무엇이고, 이 특성이 사람들이 공간을 경험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꼭 물리적인 공간일 필요가 있는가?
2017. 3. 10.¶
'내 땅에 내 돈 내고 집을 짓겠다는데 왜 법을 만들어서 마음대로 못하게 하냐'에 대한 대답은 '건물을 짓는 사람보다 건물의 수명이 더 길기 때문에 건물을 소유하는 사람을 건물을 짓는 사람에 한정지을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재산으로 볼 필요가 있기 때문' 이라는 말을 들었다.
2017. 2. 21.¶
후각이 발달하여 도시를 냄새로 파악하고 있을 생물들에게는 비가 내리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색색의 솜사탕 같은 것이 빗방울에 녹아 점점 너덜너덜해지다가 사라지는 느낌? 플러스펜으로 공기중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글자들에 물방울이 떨어져서 구석구석 번져버리는 느낌?
2017. 2. 15.¶
방.
몇 개의 벽을 허물고 새로 공간을 구획하여 한 눈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내부로 이루어진 방들을 만들 계획을 세웠는데, 벽을 다 허물고 나서야 도면이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모든 공간이 외부와 하나가 되어버렸다.
2017. 2. 10.¶
복도.
앞에는 좌우로 완벽하게 대칭인 길이 뻗어있고, 뒤에서부터 점점 바닥이 사라지고 있다.
복도에 놓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다. 왼쪽으로 가거나, 오른쪽으로 가거나, 바닥과 함께 추락하거나.
앞에서 세 가지 경우를 순차적으로 나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거슬릴 정도로 이 세 가지 선택지는 서로 동등하다.
뒤에서 사라진 바닥은 사실 이 구조물을 분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복도에 놓인 사람이 선택한 복도의 새로운 바닥으로 다시 조립되지만, 이는 떨어지기 전까지 눈치챌 수 없다. 어떤 복도도 선택하지 못하고 떨어진 사람은 기존의 작업자를 대신하게 된다. 간혹 운이 좋은 이들은 계속 같은 방향의 길을 선택해서 계속 빙글빙글 도는 길은 이미 지어진 물리적 구조물이라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숙련된 바닥 작업자들의 조립 속도를 넘어서서 앞으로 달려나갈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2017. 2. 9¶
꿈에는 눈 안쪽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작은 눈들이 나왔고, 이들은 바깥에 서있는 다른 거대한 몸들에 반사된 상을 통해서만 자신이 살고 있는 몸을 볼 수 있었다.
2017. 1. 28.¶
신호등 앞에 멈춰선 버스에서 창 밖을 바라보다가.
횡단보도 신호가 열렸고, 양 끝에서 각각 서너명의 사람들이 반대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몇몇 급해보이는 차들이 우회전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고.
하필 사람들이 다 건널 즈음의 타이밍에 저 멀리서 트렁크를 끌고 뛰어오던 여자가 횡단보도 앞에 도착했고, 아직 횡단보도 초록불 옆에 화살표가 절반도 채 내려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던 우회전 차들이 줄줄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한두대에서 끊어졌으면 여자가 횡단보도를 충분히 건넜겠으나 차, 버스들이 계속해서 뒤이어 따라갔고, 여자는 건너는 것을 포기하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2017. 1. 25¶
건축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디테일을 신경쓸 수 있었을까 - 하는 말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건축 교육을 받은 사람은 이러한 디테일을 신경쓰지 않을 수 있을까 -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을 계속 적용하여 사고하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만들어지는 디테일들, 패턴들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질문을 통해 규칙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에는 공간 생성을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만 남길 수 있을 것이고, 바로 이 지점부터 다시 되짚어가면서 지금까지 질문해온 디테일들과 패턴들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 큰 맥락에서의 건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 시대의 도면을(그리고 건축을) 무수히 중첩된 경계들의 가능성 중에서 가치가 부여된 경계의 규칙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평소 접할 수 있는 도면은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을 정제하여 남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 이를 고려한다면 더 넓은 가능성으로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도 덜 정제된, 즉, 어설픈 도면들을 접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017. 1. 23.¶
방.
직선으로 쭉 뻗는 칼날같은 빛이 거울로 된 방의 윤곽을 훑으면서 지나다니는.
빛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빛이 방 전체를 얼마나 훑고 지나가야 방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되튕기더라도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2017. 1. 5.¶
해가 지는 시간대에 2호선 열차를 타고 문에 있는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면 생각보다 살짝 차가운 계통의 풍경이 펼쳐지는데, 이때 몸을 조금 낮춰서 창문 아래쪽으로 바깥을 보면 좀 더 따뜻한 느낌의 풍경을 볼 수 있다.
키가 작은 어린 아이들은 항상 이런 느낌으로 바깥을 보았겠네-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2016. 11. 26.¶
...
쉽게 말하면 언어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도면을 분석하겠다는 말이니까 저 사람들은 도면도 언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접근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도면을 어떻게 구조화해서 학습시킬 인풋으로 변환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
벽, 문, 창과 같은 공간의 경계에 관련된 요소들과 거실, 부엌, 침실, 화장실과 같이 역할을 구분지어놓은 공간들, 복도와 같이 공간을 연결시켜주는 공간들.
이러한 요소들의 경계가 뚜렷한 설계와 일부러 경계를 흐려놓았거나 필요에 의해 역할이 합쳐져 있는 공간들.
집 뿐만 아니라 학교, 백화점, 미술관, 공원, 관공서 등의 여러 시설들의 공간 전략들.
지하철, 버스 등의 시설들을 연결시켜주는 움직이는 공간들.
...
- 며칠 전 노트 발췌
문장의 의미를 자체적으로 구조화 하는 인공지능이 개발되었다면, 그리고 우리 주변의 공간도 언어와 유사한 방식으로 구조화시킬 수 있다면, 공간의 의미를 자체적으로 구조화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6. 11. 24.¶
"문득 지나가는 버스를 보다가 따뜻한 공기덩어리가 차가운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이 흘러가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어. 색을 보듯이, 소리를 듣듯이, 온도를 감각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생각하지 않고도 느끼는 것이 가능할텐데."
...
"서늘한 겨울 공기 아래에 움직이지 않는 직육면체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있고, 자동차 크기의 덩어리들이 도시 곳곳에서 줄지어서 움직이는 광경을 상상해봐."
2016. 7. 23.¶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손가락을 튕기거나 혀로 똑딱 소리를 내서 이 소리가 사물이나 지형에 되튀어 돌아오는 것을 듣고 주변을 파악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한다.
어쩌면 이렇게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사람들에게는 특정 음악이 주변의 지형, 혹은 사물들로 파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으로, 만일 이들이 음악을 만든다면 이들이 상상하는 공간을 소리로 구현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2016. 4. 5.¶
사람들로 꽉꽉 찬 지하철 속에서 세 명의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는 삼각형을 이루어 스마트폰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내는 것을 보았다.
2015. 6. 1.¶
잠시 눈을 붙인 사이 꿈을 꾸었는데, 그곳에서는 몸을 1과 3/4바퀴 만큼 돌려야 원래 보이던 풍경을 볼 수 있었다.